지상최대의 쇼 필리버스터

미국의 필리버스터 제도에 관해 처음 들었을 때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회에는 이런 합법적인 의사결정 방해의 전통이 없는 것에 의아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우리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뜨겁다. 우리가 정치 선진국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반응, 국회의원의 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됐다는 어린 학생의 응원이 잇따른다.

이 무제한 토론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미국에서도 필리버스터로 끝까지 막은 법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저지하는 데 성공한 사례가 있다고 해도, 26일 선거구 획정을 위해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하고, 그 때 중단되지 않더라도 다음 회기가 시작되는 즉시 표결에 들어가야 하는 현재 상황을 고려해보면 “테러방지법”을 무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작금의 무제한 토론은 정치인들이 인지도를 얻어 선거에 이용하려는 정치쇼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정치쇼이면 어떤가. 서있기만도 힘이 든 다섯시간, 열시간씩 연설해서 인지도를 얻는 게 뭐 잘못인가. 이런 쇼라면 괜찮은 것 같다. 지금까지 7명의 의원이 43시간동안 ‘쇼’를 펼쳐준 덕분에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이 무엇인지, 직권상정이 왜 적법하지 못했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원래는 단순히 시간을 끄는 전략인지 몰라도, 의제에 관해서만 발언할 수 있게 되어있는 규정 덕에 내용면에서의 완성도까지 높다. 은수미 의원의 마무리 발언에는 감동의 눈물이 고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보고 있다. 말로써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호소하는 국회의원들의 목소리에 정치를 불신하고 돌아섰던 국민들이 반응하는 것을. 국민들은 처절한 몸싸움이나 보여주기식 전시행정이 아니라 말과 논리로 설득하는 국회의원들을 보고싶어해왔다는 것을. 비록 이런 것까지 하게 된 상황이 안타깝긴 해도 이로써 한국 정치에 대한 신뢰가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다는 것을. 필리버스터가 아무리 쇼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여 이 훌륭한 정치쇼를 관람할 수 있도록 선친께서 폐지한 제도를 부활시켜주신 우리 대통령님께도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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