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We Are the Weather (우리가 날씨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라고 한다. 한번도 시선을 준 적 없지만 언제나 그 곳에 있던 세계가 갑자기 인식되며 선악과를 삼킨 이브마냥 스스로의 허물을 갑자기 깨닫고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때로는 책을 읽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런 치명상을 입는다. 아무런 악의 없이, 단지 늘 그래왔으니까, 습관적으로 하던 행동이 실은 스스로가 추구하는 가치에 반한다는 것을 알아 버린다. 이미 저지른 과오를 인정하기 싫어 저자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를 찾아 몸부림치지만 내 얄팍한 사고의 헛점을 조목조목 파고드는 책 앞에 결국 항복한다. 앎으로써 상처입은 독자는 더이상 책을 읽기 전과 같은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상처를 회복하며 다른 사람 -바라건대 더 나은 사람-이 된다. Jonathan Safran Foer의 <We Are the Weather (우리가 날씨다)>는 내게 상처를 주는 책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스스로의 습관을 변호하려던 의식적, 무의식적인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책이 지적하는 바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표지에 적힌 “이 책은 삶을 변화시키는 책이며 당신과 음식의 관계를 영원히 바꿀 것이다”는 평에 고개를 끄덕였다.

We Are the Weather | Jonathan Safran Foer | Macmillan

이 책은 기후 변화를 줄이기 위해 개개인이 실천할 것을 호소하는 책이다. 저자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을 구별한다. 단순히 정보를 접하고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면, (그로 인해 상처받고) 나아가 스스로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인류의 활동으로 인해 심각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 부유한 국가의 생활수준에서 배출되는 탄소의 양은 지구가 감당 가능한 수준을 오래 전에 넘어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후 변화를 줄이려면 개인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무슨 실천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막연했다. 가령, 재활용을 열심히 하고 전기자동차를 타고 나무를 많이 심는 일들이 도움이 된다고 믿는 정도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활동들이 단지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기분을 낼 뿐이라고 한다. 물론 아무 실천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만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보다 결정적이고 중요한 실천만은 정작 외면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는 그 결정적으로 중요한 실천이 무엇인지 몰랐고 당연히 실천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 자신이 습관적으로 기후 변화를 가속해온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무엇이 중요한 실천인지조차 여지껏 몰랐다는 점이 부끄러웠다. 기후 변화가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If we accept a factual reality (that we are destroying the planet), but are unable to believe it, we are no better than those who deny the existence of human-caused climate change.

p. 23

그 실천이란 육식을 줄이는 것이다. 축산업이 탄소 배출량에 미치는 영향은 연구마다 추정치에 차이가 나지만, 축산업을 위해 불태운 삼림이 흡수하지 못하는 탄소의 양까지 감안하면 51 %까지 추정되기도 한다. 저자는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정부 정책이나 기업 규제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식습관을 바꾸는 실천 없이 기후 변화로부터 지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대규모 축산업이 환경에 부정적이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책을 읽기 전에는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그렇게 큰 줄은 몰랐다. 단지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기를 즐기는 게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사람에겐 동물성 단백질이 필요하다며 합리화했다. 그러나 동물성 단백질이 몸에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이 아니라 입의 즐거움을 위해 그 이상 먹는다는 점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라는 말이 유행하던 것을 기억한다. 얼마나 재미있는 말인가.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고기를 먹으며 스스로를 토닥이는 문화를 향유하는 일원으로서 웃었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엔 이 농담이 더이상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Changing how we eat will not be enough, on its own, to save the planet, but we cannot save the planet without changing how we eat.

p. 87

책에서 주로 비판하는 미국인들의 (어마어마한) 육식 습관에 비하면 나는 그렇게 고기를 많이 먹는 것도 아니라며 슬며시 변명해보기도 했다. 스스로가 기후변화 가속에 한 몫 하는 나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상처받는 일이기에, 어떻게든 면죄부를 주고 싶었나보다. 그러나 곧 미국인들을 탓하며 나의 식습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거대 기업들을 탓하며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 이들과 나는 본질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마찬가지로 ‘믿지 않는’ 상태인 것을 알았다. 나 역시 필요 이상의 고기를 먹고 있다는 그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 내가 지구에서 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중요하지도 않은 사실은 내 행동을 바꾸지 않을 핑계일 뿐이다. 육식이 기후변화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믿는다면’ 핑계를 댈 틈이 없다. 내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초조해지며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만큼의 실천이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고서야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를 실천으로 보는 저자의 관점이 오롯이 이해되었다. 아는 데서 그치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숙연히 상처입고 스스로 변화하며 회복해 가거나,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나는 후자의 사람이 되고 싶다. 단지 식습관을 조금 바꾸는 것이 지구를 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면, 실천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Post script

하루에 육류 섭취를 한 끼로 제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매 끼 고기를 먹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의식적으로 육식을 제한하려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름의 노력과 적응이 필요한 일이었다. 처음 이틀 정도는 배가 고팠다. 별 생각 없이 육류를 넣어 먹곤 했던 점심에서 그 부분을 단순히 제하고 식사를 했더니 포만감이 현저히 줄어든 느낌이었다. 보상심리로 저녁엔 오히려 고기를 더 찾기도 했다. 그러나 변화는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식사에 육류가 포함이 되는지 아닌지 신경쓰게 되었고, 전에는 관심 없이 지나치던 비건 식단들을 유심히 보게 됐다. 한 주가 지나자 냉장고에는 채소가 많아지고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반찬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두 주가 지날 무렵엔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빠른 변화에 스스로도 놀랐다. 나는 여전히 고기를 먹지만, 확실히 전보다 적게 먹거니와 무엇보다 내 식사가 날씨에 미치는 영향을 의식하며 먹는다.

[책] 김덕호 외,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의 4개국에서 공학이 어떻게 탄생하였고 엔지니어가 어떤 사회적 지위를 구성해왔는지를 개괄한 흥미로운 책이다. 흔히 과학과 기술은 한 덩어리로 여겨지며 공학은 과학의 응용분야로 여겨지곤 하지만 실상 역사를 들여다보면 공학은 과학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 장인 기술로부터 독자적으로 발생한 신생 학문임을 알 수 있다. 엔지니어 집단은 처음부터 동일한 뿌리에서 출발한 동질적 집단도 아니다. 국가가 주도하여 고급 관료로서의 엔지니어를 양성한 사회가 있는가하면, 각기 다른 산업 분야 – 가령 토목과 기계- 에서 각기 기술을 닦은 기술자들이 더 높은 수준의 지식과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로 엔지니어의 정체성을 확립한 사회도 있고, 엔지니어를 전문직 종사자라기보다는 기술 노동자로 받아들이는 사회도 있다. 엔지니어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다만 한국에서의 공학개념의 성립과 발전상을 간략하게라도 다루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올해의 양식

자기소개서 양식의 ‘취미’란은 난감하다. 한참을 끙끙대고도 적당히 잉여롭고 적당히 생산적인 활동이 떠오르지 않아 마지못해 ‘독서’라고 끄적인다.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취미라고 정해둘 만큼 꾸준히 독서량을 유지하지 못하는 탓만은 아니다. 남는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라기보단 숨을 쉬기 위해 읽고 있어서 그렇다. 사실 평소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일상이 어긋나고 익숙한 것이 낯설어져 불안할 때 책을 잡는다. 가치관에 금이 가고 갈라지면, 매사가 혼란스럽고 숨이 턱턱 막히면 허겁지겁 도서관을 찾는다. 허기진 배에 음식을 우겨넣듯 급히 읽는다. 좁고 딱딱한 사고체계가 무너지고 그 너머 다른 세계가 열리면 비로소 숨이 트인다. 이따금 그렇게 세계의 일부를 부수고 다시 짓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게 독서는 고상한 취미라기보단 거친 식사, 책은 양식이다.

따져보니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올해 들어 책을 가장 많이 읽었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한 해였던 모양이다. 졸업과 진로 걱정에 피어오르는 초조함, 충격적인 여성혐오 사건들과 여성문제 공론화에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로 인한 공포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폭발한 국가에 대한 배신감,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등이 시사하는 세계적 우경화 속의 불안감, 과연 독서욕이 왕성할만도 했다.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책이 고팠다. 다행히 좋은 책들이 양식이 되어주었다.

l올해의 양식을 한 권 꼽자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들겠다.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나 책을 꺼려왔지만 여성 참전자들이 증언하는 전쟁의 참상이라는 소개에 마음이 움직였다.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그런 책”이라면 읽어보고 싶었다. 과연 소녀들이 경험한 전쟁은 달랐다. 그들은 제 키보다 큰 총을 들고 전장을 누볐고 제 몸보다 배는 무거운 부상병의 몸을 끌어내며 수십명을 구해냈다. 때로는 사랑을 하기도 했고 갓난아이를 안고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여성의 목소리로 듣는 전쟁은 마음 아픈 한편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종전 후 그들에게 쏟아진 냉대와 편견은 끔찍했다.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여성들 몫의 영광은 없었다. 훈장을 모두 내다 버리고 참전했다는 사실조차 숨긴 채 ‘평범한’ 여성을 가장하고 견뎠다는 수십년의 시간은 전쟁 이상으로 혹독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말할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이 내보인 것은 원망도 후회도 아닌 찬란한 긍지였다. 많이 울었고 많이 배웠다.

l-2l-1<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도 기억에 남는다. 저자가 의도한 진정성(authenticity)과 최근 우리 정치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그 단어 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과 의도는 비슷하다. 저자는 진정성이란 정확한 정의와 실체가 있는 개념이 아니며 자기와 다른 존재를 깎아내릴 때에 주로 쓰이는 말임을 지적한다. 참신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연애하지 않을 자유 (이진송)> 역시 맛있게 읽었다. 문체가 유머러스해서 계속 키득거리면서 읽었는데 사실 내용이 가볍지만은 않다. 현대의 연애관계를 역사, 젠더 권력, 후기자본주의 등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하며 기승전연애 사회에 의문을 던진다. 이 두 권의 책은 그동안 어색하게 느끼긴 했지만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알 수 없었던 현상들을 바라보는 신선한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어느덧 2017년이 바싹 다가왔다. 새해에는 독서가 생활 속에 안정적으로 녹아들면 좋겠다. 한참을 굶다가 폭식하듯 읽는 버릇을 고쳐 규칙적으로 읽는 습관을 들이고 싶다. 젊은 날의 취미는 중년의 생계가 된다고 한다. 딴은 기꺼워서 조금씩 하는 일이라도 부단히 하다 보면 돈벌이가 될 만큼의 일가를 이루게 될 수도 있겠다. 책이 먹고살이로 이어지는 것까지는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꾸준한 취미로 삼아 마음의 체력을 기르고 싶다. 건강하게 식사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칙을 독서에도 적용해보려고 한다. 규칙적으로, 편식하지 말고, 꼭꼭 씹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