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유난히 단 걸 좋아하셨다. 어느 명절, 사촌들과 먹으려고 열 두개 들이 도넛 두어 상자를 사들고 갔다. 할아버지께서 내 손에 들린 낯선 상자에 시선을 주며 뭘 사온거냐 물으셨다. 맛 한 번 보시라고 도넛 하나를 꺼내드리자 할아버지는 달기로 유명한 그 도넛을 양손으로 잡고는 가루가 떨어지는 게 신경쓰이시는지 얼굴을 살짝 찡그리셨다. 이런 걸 왜 사왔느냐 야단이라도 맞을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한 입 베어무신 할아버지는 곧 눈을 반짝이며 주름진 얼굴 가득 웃음을 띠셨다, 소중한 것을 쥐듯 부드럽고 공손한 손으로 가슴께에 도넛을 들고. 그리 꼬장꼬장하신 양반이 그 순간 어찌나 천진한 미소를 지으시던지 벌써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유학이 결정되고 얼마 후다. 다리를 다쳐 입원해 계신 할아버지께 병문안 겸 인사를 하러 갔다. 유학 소식을 전하기가 조금 걱정되었다. 워낙에 고지식하고 꼬장꼬장한 양반이라 ‘시집도 안 간 처녀가 혼자 무슨 유학이냐’며 역정이라도 내실지 몰라서였다. 어색한 자세로 할아버지 계신 침대 옆에 앉아 몇마디 병문안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께서 내가 사들고 간 과일주스를 따서 손에 들려주시자 긴장이 좀 풀어졌다.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제가 미국에 가게 됐어요, 박사과정을 밟으러 가요. 할아버지는 잠시 놀란 표정이더니 이내 뛸듯이 기뻐하셨다. 박사 되는 공부라고? 야 그거 참 잘 되었다, 하하 니가 박사 되면 나는 박사 할애비 되는 거냐? 이야 하하하하 내가 박사 할애비가 다 되는구나. 그러면서 열심히 공부하라며 내 손을 힘껏 잡아주셨다. 그 예기치 못한 응원이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유학생활이 고되게 느껴질 때마다 우리 할아버지 ‘박사 할애비’ 만들어드려야한다는 생각을 하며 견뎠다는 걸 당신은 아실까.

마침내 대학원을 졸업한 해 가을, 한국에 갔다.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에 아빠는 가게에서 할아버지 드릴 간식을 사자고 하셨다. 나는 무슨 선물을 구멍가게에서 사느냐며 베이커리라도 가야하지 않겠냐고 했다. 어차피 할아버지는 그런 걸 못 드실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아빠가 이것저것 들려주는 것들을 손에 받았다. 부드러운 빵 몇 개, 아이스크림 바 열 개 남짓. 할아버지는 누운 몸을 일으키지도 못할만큼 쇠약해져 계셨는데, 치아도 몇 개 안 남은 양반이 내가 아이스크림을 꺼내자 몹시 반기셨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까서 손에 쥐어 드리니 누운 자세에서도 능숙하게 드셨다. 할아버지 제가 드디어 졸업을 했어요, 이제 할아버지 손녀가 박사예요. 아 니가 박사란 말이냐. 네, 할아버지께서 응원해주신 덕분에 끝까지 할 수 있었어요. 그래 야, 사람이 그렇게 말을 곱게 해야쓴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으로 내 손을 쥔 할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니가 박사란 말이냐 아이고 내가 박사 할애비란 말이냐, 고생했다 고생했어. 할아버지는 남은 아이스크림들을 무슨 보물단지처럼 쓰다듬으시며 할머니께 냉장고에 잘 보관했다가 하루에 하나씩 저녁 꼭 이 시각마다 꺼내달라고 하셨다.

열흘 정도 지나 미국으로 돌아오려던 바로 그 아침, 할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급히 비행을 미루고 장례를 치렀다. 그 때 그 때 해야할 일들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눈물 흘릴 시간도 거의 없었지만, 내가 영정 사진을 들기로 결정되자 네 품에 안겨서 가시려고 어제 가신 모양이라던 할머니 말씀에는 조금 울었다. 그 저녁에도 내가 가져간 아이스크림을 찾으셨다고 한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맛있게 잡숫고 잠드시고는 그 흐뭇한 모습 그대로 가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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