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 정의당 로고송 논란에 부쳐

나는 정의당을 지지해왔다. 당원으로 가입한 것도, 적극적으로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다닌 것도 아니지만 정의당이 추구하는 바에 대체로 공감했고 이번 20대 총선 정당투표도 정의당에 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한 사건을 목격하며 생각이 달라졌다.

발단은 대단치 않은 일이었다. 정의당의 로고송을 부른 “중식이 밴드 (이하 중밴)”가 전에 부른 노래들의 가사가 다분히 여성 혐오적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소위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정당이 이런 밴드와 협력하는 건 모순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합리적인 문제 제기였다. 위안부 문제 해결 성금을 모으는 광고에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에 출연한 모델을 쓴다면 문제가 안 일어나겠는가.

그러나 정의당 측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니 중밴 쪽에서 성급하게 사과문을 올렸다. 그런데 이 사과문이  오히려 불을 키웠다. “여자친구를 많이 사랑하니까 본인은 여성혐오자가 아니”라는 식의, 그야말로 여성혐오가 무언지도 모르는 채로 쓴 사과문이었다. 결국 여성 문제에 아무런 의식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여성혐오를 고백하는 꼴이었다. 사실 여기서 중밴의 여성혐오가 얼마나 심한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어디가 여성혐오인지 궁금하다면 “중식이 밴드는 여혐인가” 참고). 문제의 핵심은 정의당의 대응방식이다.

상황이 악화되어도 정의당에서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당원 게시판에는 반페미니즘 글들이 올랐다고 한다. 페미나치라는 표현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단다. 페미니즘을 폭력이라 주장하는 글이 소위 ‘진보’ 정당의 당원 게시판에 버젓이 유통된다는 점 자체가 코미디이다. 그런데 당 차원에서는 아무런 대응이 없다. 심각하지 않을 수 있던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은 당원들 사이에서 반페미니즘이 돌고 당 안팎의 여론이 악화되는 가운데에도 당이 수수방관하고 있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정의당에게 여성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것으로 보았다. 페미니스트들의 반발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 것이든, 혹은 문제 제기 자체는 타당하다고 생각하나 반페미니즘 성향의 지지자들을 의식한 것이든, 여성 문제는 그들의 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정의당이 살리겠다 말하는 ‘청년’은 누구인가. 2,30대 여성은 청년이 아닌가. 정의당의 공약집을 헤집어 보며 생각이 굳어졌다. 다른 정책은 공들인 티가 나는데 비해 여성 정책은 추상적인 선에 그쳤다. 그조차 대부분 원래 있던 정책을 재정비하거나 현실화하겠다는 정도의 공약이었다. 적극적인 문제 해결 의지를 보지 못했다.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 문제이다. 경제 문제, 외교 문제, 안보 문제 등등 걱정할 문제들이 산더미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여성 문제를 우선시한다고 해서 다른 문제들에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다. 소위 “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핑계로 미루어선 여성 문제가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달은 건 지난 19대 총선이었다. ‘나꼼수’ 열풍이 불었었다. 그 때 그들은 오만하게도 “원래 여성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데 우리 덕에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는 재미도 없는 농담을 했었다. 그러나 막상 선거가 끝나보니 결과는 참패. 어디선가 20대 여성 투표율이 어쩌고 하는 유언비어가 들렸다. 나로선 선거에 진 것보다는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남성들에게서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 백배는 분했다. 선거의 주인은 남자들이고 여자들은 들러리라는 인식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의 구호를 함께 외쳐주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면 그들도 페미니즘을 위해 소리높여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은 것이었다. 나는 여성문제를 ‘나중에’ 해결하자는 말은 더이상 믿지 않기로 했다.

다시 정의당으로 돌아와 보자. 사실, 개인적으로는 과거에 여성혐오 가사를 쓴 밴드와 협업을 하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로고송 자체가 여성 혐오적이지만 않다면.  그러나 협업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비판에 준비하지 않았다면, 심지어 그런 비판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명백히 정의당의 책임이다. 게다가 사건 발생 이후에는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조차 접도록 하는 태도를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공약집의 여성 정책도 빈약했다. 결국 나는 정의당에 투표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좀 더 구체적인 여성 정책을 제시한 다른 군소 정당에 투표했다. 물론, 언젠가 정의당이 좋은 여성 정책을 들고 나오면 기꺼이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아니었다. 누구나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우선 기준으로 삼아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에게 그런 권리가 있고, 그래서 그 권리를 행사했다.

며칠 동안 진지하게 고민한 것이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정의당에 등을 돌린 것으로 안다. 그런데 중밴의 과거 노래 가사를 알고는 감정적으로 지지를 철회하는 것처럼 보는 시선이 있다. 그런 시선에 심히 우려를 표하는 바이다. 그것은 비단 여성 문제를 가볍게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동료 시민의 합리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다른 의견은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로 민주주의가 가능하겠는가. 당신에게는 사소한 문제인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걸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 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지상최대의 쇼 필리버스터

미국의 필리버스터 제도에 관해 처음 들었을 때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회에는 이런 합법적인 의사결정 방해의 전통이 없는 것에 의아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우리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뜨겁다. 우리가 정치 선진국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반응, 국회의원의 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됐다는 어린 학생의 응원이 잇따른다.

이 무제한 토론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미국에서도 필리버스터로 끝까지 막은 법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저지하는 데 성공한 사례가 있다고 해도, 26일 선거구 획정을 위해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하고, 그 때 중단되지 않더라도 다음 회기가 시작되는 즉시 표결에 들어가야 하는 현재 상황을 고려해보면 “테러방지법”을 무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작금의 무제한 토론은 정치인들이 인지도를 얻어 선거에 이용하려는 정치쇼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정치쇼이면 어떤가. 서있기만도 힘이 든 다섯시간, 열시간씩 연설해서 인지도를 얻는 게 뭐 잘못인가. 이런 쇼라면 괜찮은 것 같다. 지금까지 7명의 의원이 43시간동안 ‘쇼’를 펼쳐준 덕분에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이 무엇인지, 직권상정이 왜 적법하지 못했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원래는 단순히 시간을 끄는 전략인지 몰라도, 의제에 관해서만 발언할 수 있게 되어있는 규정 덕에 내용면에서의 완성도까지 높다. 은수미 의원의 마무리 발언에는 감동의 눈물이 고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보고 있다. 말로써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호소하는 국회의원들의 목소리에 정치를 불신하고 돌아섰던 국민들이 반응하는 것을. 국민들은 처절한 몸싸움이나 보여주기식 전시행정이 아니라 말과 논리로 설득하는 국회의원들을 보고싶어해왔다는 것을. 비록 이런 것까지 하게 된 상황이 안타깝긴 해도 이로써 한국 정치에 대한 신뢰가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다는 것을. 필리버스터가 아무리 쇼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여 이 훌륭한 정치쇼를 관람할 수 있도록 선친께서 폐지한 제도를 부활시켜주신 우리 대통령님께도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