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입고 일하기 좋은 날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평범하디 평범한 착장이 논란거리가 되는 걸 보며 Coding like a girl 이라는 글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원피스를 즐겨입는 여성 프로그래머인 필자가 자기 복장이 “여성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비전문가로 본다며 지적하는 바 하나하나가 내가 정말로 겪은 일들이고 너무나 공감가는 일들이라서 몇 번을 다시 꺼내 읽었던 글이다.

남성이 대다수인 공학 전문가 커뮤니티에서 일하는 나도 마찬가지 일들을 겪는다. 조금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일을 하러 가면 별의 별 사람을 다 겪는다; 비전문가로 보고 무시하는 사람, 남성들에게 잘보이려고 차려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일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나의 무슨 태도가 어떻다고 지적질하는 사람 등등. 다들 같은 학원이라도 다니는지 어쩜 그리 하는 짓이 비슷한 지 모른다. 더욱 신기한 점은 그런 일들이 검은 정장, 하다못해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었을 때에는 훨씬 덜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피스를 입고 일하러 가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이 바닥에 안 있어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일인지도 모르지만, 어느정도 싫은 소리를 들을 각오와 그 싫은 소리에 빅엿을 날릴 연습을 하고 입는다. 그럴거면 그냥 안 입으면 되지 않느냐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좋아하는 옷을 입고 일을 할 권리가 있다. 비난은 그 권리를 행사하는 쪽이 아니라 그 권리를 행사하기 어렵게 만드는 자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IT 회사에서 일한 경험도 있는 류의원이 원피스를 입고 출근한 것은 아무래도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고작 원피스를 입는 게 무슨 저항이냐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없어서 정말로 저항이 되어 버리는 세상이라는 것이 이번 류의원의 일로 드러났다. 류의원이 “이렇게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진보 정치인이 해야 할 일 아닐까”라고 했다는데, 그의 시원한 행동과 논란에 대한 대응이 내게는 부스럼이 아니라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것 같았다. 요즘 참 원피스 입고 일하기 좋은 날씨인 것 같다. 내일은 원피스를 입고 출근해야지 – 재택근무이긴 하지만.

전문가라는 이름

‘소리공학’ 전문가를 자처하며 아무말 대잔치를 벌여오던 한 대학교수가 있다. ‘강남스타일이 인기를 끄는 이유‘나 ‘비가 오면 부침개가 먹고 싶은 이유‘ 따위 대중의 흥미를 끌만한 소재삼아 스펙트럼 몇 개 띄워놓고 적당히 둘러대는 방식으로 인기를 끌더니, 어느새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나 한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문제들에 관해서까지 무책임한 ‘전문가 견해’를 늘어놓아 왔다. 전공자들 사이에선 이미 악명이 높은 그였지만 ‘학계’는 사회에 어떤 경고음도 울리지 못했다. 드높은 상아탑에 올라 속세를 굽어보며 그의 허술한 논리들을 우스갯거리로 소비할 뿐이었다.

나선 것은 언론이었다. 피디수첩이 숭실대학교 배명진 교수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언론이 그의 아무말이 ‘전문가 견해’로 받아적은 지난 이십여년 동안에도, 그의 ‘전문가 견해’에 의심을 표한 이번에도 ‘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소수의 연구자들만이 개별적으로 비판에 동참했을 뿐이다. 방송 이후 한 달여가 지났는데 어떤 후속 조치가 취해졌는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는 여전히 교수직을 보전하고 있으며 그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에 대해서도 아무런 해명이 없다.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오랫동안 지켜봐 왔고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것이다. 이것은 배명진이라는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학계와 사회의 관계맺음에 관한 문제이다. 개개인은 연구자로서 ‘학계’의 ‘인정’을 업고 전문가라는 이름을 획득하고 사회적 명성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전문가라는 이름을 한 번 획득한 개인이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다녀도 학계가 그 이름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결국 전문가라는 이름이란 한없이 가벼운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바로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전문가의 권위’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