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양식

자기소개서 양식의 ‘취미’란은 난감하다. 한참을 끙끙대고도 적당히 잉여롭고 적당히 생산적인 활동이 떠오르지 않아 마지못해 ‘독서’라고 끄적인다.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취미라고 정해둘 만큼 꾸준히 독서량을 유지하지 못하는 탓만은 아니다. 남는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라기보단 숨을 쉬기 위해 읽고 있어서 그렇다. 사실 평소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일상이 어긋나고 익숙한 것이 낯설어져 불안할 때 책을 잡는다. 가치관에 금이 가고 갈라지면, 매사가 혼란스럽고 숨이 턱턱 막히면 허겁지겁 도서관을 찾는다. 허기진 배에 음식을 우겨넣듯 급히 읽는다. 좁고 딱딱한 사고체계가 무너지고 그 너머 다른 세계가 열리면 비로소 숨이 트인다. 이따금 그렇게 세계의 일부를 부수고 다시 짓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게 독서는 고상한 취미라기보단 거친 식사, 책은 양식이다.

따져보니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올해 들어 책을 가장 많이 읽었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한 해였던 모양이다. 졸업과 진로 걱정에 피어오르는 초조함, 충격적인 여성혐오 사건들과 여성문제 공론화에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로 인한 공포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폭발한 국가에 대한 배신감,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등이 시사하는 세계적 우경화 속의 불안감, 과연 독서욕이 왕성할만도 했다.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책이 고팠다. 다행히 좋은 책들이 양식이 되어주었다.

l올해의 양식을 한 권 꼽자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들겠다.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나 책을 꺼려왔지만 여성 참전자들이 증언하는 전쟁의 참상이라는 소개에 마음이 움직였다.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그런 책”이라면 읽어보고 싶었다. 과연 소녀들이 경험한 전쟁은 달랐다. 그들은 제 키보다 큰 총을 들고 전장을 누볐고 제 몸보다 배는 무거운 부상병의 몸을 끌어내며 수십명을 구해냈다. 때로는 사랑을 하기도 했고 갓난아이를 안고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여성의 목소리로 듣는 전쟁은 마음 아픈 한편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종전 후 그들에게 쏟아진 냉대와 편견은 끔찍했다.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여성들 몫의 영광은 없었다. 훈장을 모두 내다 버리고 참전했다는 사실조차 숨긴 채 ‘평범한’ 여성을 가장하고 견뎠다는 수십년의 시간은 전쟁 이상으로 혹독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말할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이 내보인 것은 원망도 후회도 아닌 찬란한 긍지였다. 많이 울었고 많이 배웠다.

l-2l-1<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도 기억에 남는다. 저자가 의도한 진정성(authenticity)과 최근 우리 정치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그 단어 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과 의도는 비슷하다. 저자는 진정성이란 정확한 정의와 실체가 있는 개념이 아니며 자기와 다른 존재를 깎아내릴 때에 주로 쓰이는 말임을 지적한다. 참신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연애하지 않을 자유 (이진송)> 역시 맛있게 읽었다. 문체가 유머러스해서 계속 키득거리면서 읽었는데 사실 내용이 가볍지만은 않다. 현대의 연애관계를 역사, 젠더 권력, 후기자본주의 등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하며 기승전연애 사회에 의문을 던진다. 이 두 권의 책은 그동안 어색하게 느끼긴 했지만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알 수 없었던 현상들을 바라보는 신선한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어느덧 2017년이 바싹 다가왔다. 새해에는 독서가 생활 속에 안정적으로 녹아들면 좋겠다. 한참을 굶다가 폭식하듯 읽는 버릇을 고쳐 규칙적으로 읽는 습관을 들이고 싶다. 젊은 날의 취미는 중년의 생계가 된다고 한다. 딴은 기꺼워서 조금씩 하는 일이라도 부단히 하다 보면 돈벌이가 될 만큼의 일가를 이루게 될 수도 있겠다. 책이 먹고살이로 이어지는 것까지는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꾸준한 취미로 삼아 마음의 체력을 기르고 싶다. 건강하게 식사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칙을 독서에도 적용해보려고 한다. 규칙적으로, 편식하지 말고, 꼭꼭 씹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