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 백만개 촛불 속에서

광화문 앞에 백만개 촛불이 켜졌다. 압도적인 수의 군중이 촛불로 서로를 밝히는 밤의 광경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그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도 걱정거리를 찾았다. 이 걱정거리들도 다 잘 해결돼서 한 10년 쯤 후엔 다 기우였다며 웃기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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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는 기사에 누군가 “어린 학생들까지 이런 데 나가게 해서 미안하다”는 댓글을 남겼다. 선배 시민으로서 이런 세상을 만들어버린 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심정에는 공감하지만 그 이유가 석연찮다. 청소년이 집회에 참석하는 것에 ‘미안해’하는 것은 미성년자가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에게도 사회에 정치적 요구을 할 권리가 있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다. 그들은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할 뿐이다. 어째서 그들이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에 ‘미안하다’고 말하는가. 청소년도 동료 시민이다. 함부로 미안해하지도 말고, 감히 대견해하지도 말 일이다. 멀찍이서 구경하며 대상화할 게 아니라 곁에 서서 목소리를 듣고 생각을 나누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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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당선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박근혜와 싸우는 동시에 여성혐오와 싸워야 하겠구나.” 아니나다를까 이번에도 박근혜와 최순실의 여성이라는 특성 자체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꼴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유력 정치인 입에서도 ‘아낙네’라느니 ‘아주머니’라느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판국이다. 여성을 비롯해 장애인, 청소년 등 소수자를 억압하며 외치는 정의는 반쪽자리 모순덩어리 정의일 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를 지적하고 자정해나가는 움직임 역시 눈에 띈다는 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성혐오적 표현을 지적하면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사소한’ 데에 집착한다며 핀잔을 주던 분위기였음을 떠올리면 참 다행한 일이다. 세상은 반드시 변한다. 냉소와 싸우며 계속 나아가다 보면 벼락같이 변화는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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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위’에 대해 생각한다. 이번에도 시작도 하기 전부터 집회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물리적 충돌이 있으면 국면전환 계기가 되어버릴 수 있다며 행동거지에 유의할 것을 당부하는 말들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안타깝게도 최근 몇 년 간 언론의 ‘폭력시위’ 프레임에 갇혀 집회 참가자들은 강박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기검열을 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말하는 이의 ‘태도’를 핑계삼아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는 것은 권력자의 못된 버릇이다. 집회 참가자와 공권력 간의 충돌 유뮤보다 시민들이 시위로 전하려는 메시지가 얼마나 정당한가가 훨씬 중요하다.주최측이 보다 많은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무력충돌 없는 안전한 집회를 전략적으로 기획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며, 그 긍정적 효과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당연한 권리인 시위가 권력자가 정한 테두리에 갇혀버린 상황은 염려된다. 한오라기 흠결 없는 자에게만 발언권을 ‘허용’하는 관습은 결과적으로 권력자의 손을 들어줄 뿐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부치는 스물 다섯개 토막 생각

아직도 차마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범죄가 일어났다. 서울 한복판, 너무도 친숙한 공간에서.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온 것이 고통스럽게 죽어야할 단 하나의 이유였다. 여성들의 곡성이 터져나왔다. 며칠 안되는 시간 동안 여기에는 수많은 사건과 생각이 얽혀 거대한 여성문제의 집합소가 되었다. 누군가 강남역 살인사건의 어느 부분이 쟁점이냐고 묻는다 해도 도무지 하나를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아 하나의 글로 엮을 수도 없었다. 대신 짤막하게 하나씩 기록해 보았다. 적다보니 스물 다섯개나 되었는데도 쓴 말보다 쓰지 못한 말이 더 많다.

1. 남녀로 편가르는 것이 아니다 –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가부장제의 악습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남성 페미니스트와 여성 여성혐오자들을 많이 보아 왔다. 성별에 기반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단순하게 성대결로 치환하는 이들을 경계해야한다.

2. 이제는 여성혐오의 ‘혐오’를 감정상의 호불호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한 번 더 강조한다. 여성혐오는 사회문제이다. 여성에게 특정한 성역할을 강요하고 억압하고 착취한 가부장제가 수천년 지속되는 동안 사회 구성원의 무의식 속에 일종의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의식적으로는 성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무의식 속에는 여성적인 것은 열등하며 여성은 부수적인 존재이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이다 와 같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여성에게 고정된 성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성혐오(misogyny)일 가능성이 높다.

3.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들에게 페미니스트의 언어는 과격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한 쪽에 독점된 권력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기득권층이 자발적으로 대화에 응하지는 않다보니, 불러다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면 때로 윽박질러야할 때도 있다. 페미니즘의 과격한 언어 때문에 당황하신 분들께 송구스럽지만 우리에게는 친절하고 품위있는 말을 고를만큼의 여유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변명을 보태자면 서양에선 여성들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것은 물론 폭탄테러도 서슴치 않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상당히 점잖고 숙녀적인(?) 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남성들이 여성혐오자로 낙인찍힐까봐 자유롭게 의견표현을 못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김영란법 때문에 뇌물을 주고받지 못해 경기가 침체된다고 걱정하던 기사가 생각났다. 꼴페미로 낙인찍힐까봐 아무 말도 못하던 여성들에 대해서는 기사가 나온 적도 없는데.

5. 우리는 남성들이 아무 말도 못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문제에 관해 대화하고 싶다. 더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과의 토론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누가 누구를 이기기 위한 설전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살아도 남성과 여성은 -또한 둘 중 하나의 성으로 특정할 수 없는 성별의 사람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산다. 서는 곳이 다르면 보는 풍경도 다르다고 했다. 설령 그 풍경을 볼 수는 없다해도 다른 (틀린 게 아니라) 풍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는, 이제까지의 객관성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경험이 객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기존의 객관성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객관성을 부분화, 맥락화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이란 권력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며, 권력 관계에 따라 변한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6. 가까운 사람들 입에서도 여성혐오적인 말이 나올 때가 있다. 나는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게 지적할 방법을 고민하다 타이밍을 놓친다. 고민이 많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결코 악의적으로 여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말로 나를 걱정해서 조언한다고 해주는 말일 때가 많다. 칭찬한다고 해주는 말일 때도 있다. 그 선의가 나를 슬프게 한다.

7. 여성 역시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도 여성혐오를 나에게서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다. 무의식에 여성혐오가 없는 사람은 아마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여성혐오를 인지하고 중지하려는 노력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이다. 나는 본인이 여성혐오를 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일수록 여성혐오자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8.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며 억울해하는 남성들의 다른 한 쪽에는 스스로 잠재적 가해자라고 고해하는 남성들이 있다. 무의식에 깔린 여성혐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부지불식간에 가해자가 되었을지도 모름을 반성하는 태도를 존경한다. 그것이 ‘선량한’ 자신을 의심하고 부정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임을 알기 때문에 더 그렇다.

9. 그러나 나는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스스로 잠재적 가해자라 말하며 사과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여성 대상 범죄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면서 가해자를 변호하거나, 가해자가 ‘진짜남자’가 아니라면서 남성집단에서 분리해고 있는 이들을 돌아봐 주기 바란다.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해주면 좋겠다.

10. 한 정신장애인의 개인적 일탈로 치부하면 일반 남성들은 더이상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 직원의 개인적 일탈이라고 하면 국정원은 댓글사태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선장의 무책임 탓으로 돌리면 된다. 세월호 참사 앞에 정부는 떳떳하다.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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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가해 남성이 살인까지 결행하게 된 것에는 조현병 증상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근본 원인은 아니다. 그의 내면에 여성혐오가 없었다면 여성에 대한 불합리한 증오심을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범행동기가 여성혐오가 아니었다면 대여섯명의 남성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끈질기게 여성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조현병 환자들의 이상행동에는 사회적 맥락이 있음을 언급하며 가해자에게 정신병력이 있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사회에 팽배한 여성혐오를 직시해야한다고 했다.

12.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가 자/타해를 할 확률은 일반인보다도 낮으며 강력범죄 피의자의 대부분에게는 정신질환이 없다고 한다. 발병 초기 불안정한 상태에만 적절한 약물치료를 받으면 안정적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그런데 조현병 환자들을 격리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들고 나오는 것은 얼마나 근시안적인가. 이는 또한 열심히 투병하고 있는 조현병 환자들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 보통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지 않기 위해 조현병 환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일반화하는 것은 괜찮은가?

13. 사회는 여성에게 가르친다. 남성에게는 제어불능의 폭력성이 내재되어있는데, 이 폭력성은 여성이 행동을 잘못할 때 폭발할 수 있는 것이니 버튼을 누르지 않게 조심하라고. 이 가르침은 여성의 안전을 기원하는 선의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 가르침이야말로 모든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라는 말이지 않은가. 나는 이 가르침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폭력성은 성별에 무관한 것이고, 얼마든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제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남성의 폭력성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떨칠 수는 없다. 폭력성을 나에게 분출하고는 “저 여자가 버튼을 눌렀어”라고 핑계댈 자를 언제 마주치게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4. 선량한 남성이 99.9% 인 가운데 0.1%라도 나를 강간하거나 살해하려고 노리는 자가 섞여 있다면, 나는 100% 모든 낯선 남성을 잠재적 위험으로 간주하고 경계하는 편이 안전하다. 길에서 스친 남성이 나를 적대적 눈빛으로 보기만 해도, 대중교통에서 모르는 남성이 너무 가까이 서기만 해도, 혹은 인적 드문 밤길을 걸을 때 발소리만 들려와도 나도 모르게 머리털이 쭈뼛 서며 방어태세가 된다.

15. 여성 대상 강력 범죄가 이슈가 될 때면 잔소리를 듣는 것은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들 쪽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 조심에는 비용이 든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하던 일을 중단하고 일찍 귀가해야 하고 가야할 곳에 자유롭게 가지 못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참아야 하고 남성 동행 없이는 택시도 타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매일 걷는 거리를 걸을 때에도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루이틀이 아니라 매일 외출할 때마다 신변 걱정을 하는 것에는 큰 에너지가 소모된다. 특히, 해야할 일을 다 못하고 가야할 곳에 가지 못하는 것이 반복되면 내가 충분히 성취할 수 있었던 것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16. 그런데 나는 이렇게 개개인이 주변을 경계하는 전략의 효과도 의심스럽거니와, 설령 효과가 있더라도 사회 전체의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껏해야 나 말고 다른 여성에게 불운이 옮겨가도록 만드는 것이 조오심에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효과 아닌가.

17. 내가 조오심을 불신하는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이러저러하게 조심해야 폭행당하지 않는다는 말을 뒤집으면 그러지 않았을 때 당하는 폭행에는 내가 조심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사람들에겐 피해자가 입은 옷이나 평소 행실,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 같은 데서 원인을 찾는 버릇이 있다. 진실은, 내가 어떤 옷을 입든 어디에 가든 무슨 말을 하든 폭행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8. 여성이 매번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이유가 단지 완력 차이는 아니다. 가상의 동양인이 백인에게  살해당한 우화로부터 폭력이 단지 체급 문제는 아니라는 것, 폭력이 약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되새겨볼 수 있다. 여성을 단지 ‘신체적 약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에는 여성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너무나 작고 가늘다.

19. ‘강간문화 (rape culture)’라는 말이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용인되거나 정상으로 간주되는 환경“을 뜻하는 말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묵인함으로써 폭력을 확산하고 또한 그 폭력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여성을 종속되게 한다는 개념이다. 논란이 있는 개념이긴 하다. 그러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쉽게 용서되고 오히려 피해자가 원인제공을 했다고 생각하거나 피해자가 됨으로써 이득을 취하려는 게 아니냐 (꽃뱀)는 의심을 하는 사회현상을 수없이 목격한 것이 사실이다.

20. 사건 발생 직후 언론은 어땠나. 여러 범행동기 가설 중에서도 용의자의 비상식적인 진술을 택해 ‘여자가 무시해서’라는 제목의 기사를 도배했다. 여성들에게 “남자 무시하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그 진술에 대해 ‘그게 말이 되냐 다른 범행동기 숨기려고 뻥치는 거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면 제목으로까지 뽑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와중에 고인을 ‘화장실녀’라는 모욕적 명칭으로 대상화한 기사도 있었으니…

21. 여성혐오살인이 발생했음을 인식한 여성들이 사회의 여성혐오가 위험수준임을 지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상치 못한 거센 반향에 가해자의 정신병력이 갑자기 강조됐다. 진실인 양 도배됐던 가해자의 진술이 곧바로 망상적 헛소리로 전락했다. 충분한 정신감정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경찰측은 정신 이상자 소행이며 한국에는 혐오범죄가 없다고 서둘러 일축했다. 하나의 사례로 혐오범죄가 일어난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이것은 여성혐오범죄의 첫 사례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여성혐오라는 개념조차 없었으니 혐오범죄로 규정되지 못했을 뿐.

22.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던가. 어째서 연쇄살인범은 거의 항상 여성을 타겟으로 삼는가? 완력 차이는 설명의 일부는 될 수 있어도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들이 살인을 정당화하던 논리에는 언제나 여성혐오가 있었다.

23. 이 사건은 분명 사회적 약자를 향해 분출된 분노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특정집단에게 향해진 분노임을 간과하고 ‘사회적 약자’로 뭉뚱그려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불평등 문제의 해결은 불평등이 존재하는 부분을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여성혐오범죄를 여성혐오범죄라고 규정하지조차 못하는 단계에 있다. 여성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맗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아무런 실천도 누구의 책임도 수반하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여성혐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혐오다. 계층의 단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단절이다. 당신의 불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불행이다.” 말이 되는 것 같다. 의미 없는 말일수록 말이 되는 것 같다.
황현산

24. 지금 한국에 있는 여성들은 혼자서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조차 겁이 난다고들 한다. 그 공포에 충분히 공감한다, 나 역시도 느껴본 적이 있으므로. 그러나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도 무서움을 멈추어 하던 일들을 계속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나의 삶까지 포기할 수는 없기에. 또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생존의 방법이라고 믿기에.

25. 사람들의 관심은 곧 사그라들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생활 속으로 돌아가야하고 각자 생활의 무게를 지기도 바쁠 것이다. 그러니 지속적으로 내 몫의 목소리까지 내어줄 사람들에게 후원금을 보낸다. 약소하나마, 내 지지와 염원을 표현하는 의미에서라도.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 정의당 로고송 논란에 부쳐

나는 정의당을 지지해왔다. 당원으로 가입한 것도, 적극적으로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다닌 것도 아니지만 정의당이 추구하는 바에 대체로 공감했고 이번 20대 총선 정당투표도 정의당에 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한 사건을 목격하며 생각이 달라졌다.

발단은 대단치 않은 일이었다. 정의당의 로고송을 부른 “중식이 밴드 (이하 중밴)”가 전에 부른 노래들의 가사가 다분히 여성 혐오적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소위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정당이 이런 밴드와 협력하는 건 모순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합리적인 문제 제기였다. 위안부 문제 해결 성금을 모으는 광고에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에 출연한 모델을 쓴다면 문제가 안 일어나겠는가.

그러나 정의당 측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니 중밴 쪽에서 성급하게 사과문을 올렸다. 그런데 이 사과문이  오히려 불을 키웠다. “여자친구를 많이 사랑하니까 본인은 여성혐오자가 아니”라는 식의, 그야말로 여성혐오가 무언지도 모르는 채로 쓴 사과문이었다. 결국 여성 문제에 아무런 의식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여성혐오를 고백하는 꼴이었다. 사실 여기서 중밴의 여성혐오가 얼마나 심한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어디가 여성혐오인지 궁금하다면 “중식이 밴드는 여혐인가” 참고). 문제의 핵심은 정의당의 대응방식이다.

상황이 악화되어도 정의당에서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당원 게시판에는 반페미니즘 글들이 올랐다고 한다. 페미나치라는 표현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단다. 페미니즘을 폭력이라 주장하는 글이 소위 ‘진보’ 정당의 당원 게시판에 버젓이 유통된다는 점 자체가 코미디이다. 그런데 당 차원에서는 아무런 대응이 없다. 심각하지 않을 수 있던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은 당원들 사이에서 반페미니즘이 돌고 당 안팎의 여론이 악화되는 가운데에도 당이 수수방관하고 있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정의당에게 여성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것으로 보았다. 페미니스트들의 반발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 것이든, 혹은 문제 제기 자체는 타당하다고 생각하나 반페미니즘 성향의 지지자들을 의식한 것이든, 여성 문제는 그들의 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정의당이 살리겠다 말하는 ‘청년’은 누구인가. 2,30대 여성은 청년이 아닌가. 정의당의 공약집을 헤집어 보며 생각이 굳어졌다. 다른 정책은 공들인 티가 나는데 비해 여성 정책은 추상적인 선에 그쳤다. 그조차 대부분 원래 있던 정책을 재정비하거나 현실화하겠다는 정도의 공약이었다. 적극적인 문제 해결 의지를 보지 못했다.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 문제이다. 경제 문제, 외교 문제, 안보 문제 등등 걱정할 문제들이 산더미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여성 문제를 우선시한다고 해서 다른 문제들에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다. 소위 “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핑계로 미루어선 여성 문제가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달은 건 지난 19대 총선이었다. ‘나꼼수’ 열풍이 불었었다. 그 때 그들은 오만하게도 “원래 여성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데 우리 덕에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는 재미도 없는 농담을 했었다. 그러나 막상 선거가 끝나보니 결과는 참패. 어디선가 20대 여성 투표율이 어쩌고 하는 유언비어가 들렸다. 나로선 선거에 진 것보다는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남성들에게서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 백배는 분했다. 선거의 주인은 남자들이고 여자들은 들러리라는 인식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의 구호를 함께 외쳐주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면 그들도 페미니즘을 위해 소리높여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은 것이었다. 나는 여성문제를 ‘나중에’ 해결하자는 말은 더이상 믿지 않기로 했다.

다시 정의당으로 돌아와 보자. 사실, 개인적으로는 과거에 여성혐오 가사를 쓴 밴드와 협업을 하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로고송 자체가 여성 혐오적이지만 않다면.  그러나 협업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비판에 준비하지 않았다면, 심지어 그런 비판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명백히 정의당의 책임이다. 게다가 사건 발생 이후에는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조차 접도록 하는 태도를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공약집의 여성 정책도 빈약했다. 결국 나는 정의당에 투표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좀 더 구체적인 여성 정책을 제시한 다른 군소 정당에 투표했다. 물론, 언젠가 정의당이 좋은 여성 정책을 들고 나오면 기꺼이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아니었다. 누구나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우선 기준으로 삼아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에게 그런 권리가 있고, 그래서 그 권리를 행사했다.

며칠 동안 진지하게 고민한 것이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정의당에 등을 돌린 것으로 안다. 그런데 중밴의 과거 노래 가사를 알고는 감정적으로 지지를 철회하는 것처럼 보는 시선이 있다. 그런 시선에 심히 우려를 표하는 바이다. 그것은 비단 여성 문제를 가볍게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동료 시민의 합리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다른 의견은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로 민주주의가 가능하겠는가. 당신에게는 사소한 문제인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걸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 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왜 혐오와 혐오를 구별해야 하는가

말장난 같지만 그렇다. 사회문제로서의 ‘혐오’는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혐오’와는 다르다. 그러나 혐오가 사회문제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은 두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섞어 쓰며 경계를 흐린다.  <왜 혐오와 차별을 구별해야하는가> 를 읽으며 필자 임예인이 전자의 의미를 잘 모르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라면 어째서 ‘산낙지를 혐오하는 것’과 ‘여성을 혐오하는 것’을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혐오문제를 호불호의 영역으로 교묘히 편입시키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누군가 산낙지를 혐오하는 것은 그냥 산낙지를 싫어하는 것이지만 여성을 혐오하는 것에는 그 이상의 정치적 의미가 들어간다.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어휘가 일상에서 사용되는 어휘와 의미가 어긋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도 일상에서 의미하는 왼쪽 오른쪽 방향과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혐오라는 단어가 정치적 맥락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면 시간을 조금 내서 아래 인용문을 봐주기 바란다. 사실 임예인이 반박하고 있는 <‘개독’은 혐오표현일까?> 에 사회문제로서의 혐오는 제법 명쾌하게 정의되어 있다.

여기서 논의된 ‘혐오’는 인간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혐오의 감정 그 자체가 아니다. 개인의 감정을 법적, 제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감정을 빌미로 특정 집단을 낙인찍은 뒤 폭력을 휘두르고, 제도적 차별을 조장하며, 그렇게 타인을 실존적으로 위협할 때, 우리는 그것을 ‘혐오표현’이라고 이름하고 규제할 수 있다. (손희정, <‘개독’은 혐오표현일까?>, 경향신문 2016-02-16)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점잖게 “저는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의 도덕적 신념을 표현한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고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법에 서명하며 하는 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의 발언과 행위는 곧 비난에 직면할 것이다. 백인 청년이 “흑인들은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더러워서 싫다”라고 하면 단순히 호불호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게 된다. 백인이 흑인을 착취하고 차별해온 역사적 맥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백인 청년은 스스로 역사적 맥락에 무지했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을 한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혐오는 내면화된 차별이다.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혐오가 차별이 아니라는 주장은 맥락에 무지할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맥락 속에 살고 있는가. 수천년 지속되어 온 가부장제라는 맥락이 있다. 가부장제는 여성이 욕망하는 대상과 욕망 그 자체를 하찮은 것, 무가치한 감정으로 취급한다. 여성을 가정의 수호자라는 지정석에 가두고’정상적’인 가정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사회적으로 매장해왔다. 가사노동이나 육아 등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떠넘겨진 노동에는 경제적 가치조차 매기지 않는다. 가정 밖 사회도 대부분 남성의 보조자 역할로서의 자리만을 허용한다. 여성스러운 태도는 비전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뛰어난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여성이라도 외모로 품평을 한다. 여성이 하는 소비는 남자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하는 것이라고들 지레짐작한다. 여성을 복장과 태도 다방면에서도 철저히 통제한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본능에 이끌린’ 가해자 보다는 ‘칠칠치 못한’ 피해자를 비난한다. 아무리 성폭력 가해자 80%는 면식범이고 대다수가 계획범죄라는 객관적인 증거를 가져다 주어봤자 피해자가 짧은 치마를 입고 밤거리를 거닌 게 아니냐는 둥 애꿎은 품행을 탓하기 일쑤이다. 우리가 여성혐오라고 할 때에는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성을 평가절하하고 억압하는 사회 풍조, 이것을 차별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는가.

물론, 임예인이라는 사람이 여성혐오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성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는 해당 글에서도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를 동등하게 둘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혔고, 성차별 문제도 성의있게 다루었다. 그럼에도 그의 글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고의였든 아니든 ‘혐오’ 개념에 물타기를 함으로써 여성이 정치적으로 고안해낸 언어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혐오가 수입된 용어이든 일상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든 그 단어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여성들이 독선적 태도를 취하든 상관없이 혐오는 -그가 말한대로- 혐오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어떤 단어가 힘을 잃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단어를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사용해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차별적인 의미로 쓰이던 단어를 오히려 차별받던 대상이 더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무력화 시킨 사례들도 있다. 성소수자가 스스로를 ‘퀴어(queer)’라고 칭하고 축제를 열거나, 성폭력은 여성의 옷차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괴이한 옷차림을 하고 ‘슬럿(slut)’ 행진을 하는 것 등은 단어가 가진 부정적 맥락을 파괴하고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부여한다.

SlutWalk NYC October 2011 Shankbone 28

슬럿워크 현장 (photo from flickr)

저항적 의미로 고안된 단어가 탈맥락화하면 무력해지기는 마찬가지이다. ‘혐오’라는 단어를 통해 관습적으로 지속되어 오던 여성에 대한 무의식적 차별이 비로소 개념적으로 규정되고 여성운동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이 단어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쓰이면서 그 힘은 급격히 약해지고 있다. 외국인, 장애인 등 다른 사회적 약자 혐오에까지 논의가 확대되기도 전에 말이다. 방송에까지 ‘남성혐오’가 마치 여성혐오와 마찬가지의 사회문제인 양 등장한 것을 보며 혐오 프레임의 유통기한은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임예인의 글을 읽으며 아무래도 당분간 이 단어, ‘혐오’를 지키려는 노력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혐오라 부를만한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 그리고 제도적으로 혐오를 규제하기 어렵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여성’혐오’와 남성’혐오’ 사이의 엄연한 간극을 모호하게 지나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전자는 차별적 풍조이고, 후자는 산낙지 혐오와 비슷한 감정상의 문제이다. 메갈리아라는 커뮤니티에 한국 남성을 싸잡아 비하하고 욕지거리를 해대며 싫다싫다 혐오한다 떠드는 글이 실리기는 한다. 그런 의미의 남성혐오가 존재한다고는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호들갑 떨 문제인가. 산낙지를 싫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산낙지의 싫은 점을 떠드는 게 사회문제이냐는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남성을 혐오해도 실제 사회에서 남성의 실존을 위협하는 차별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사실, 메갈리아에 등장한다는 남성혐오는 여성혐오를 거울에 비춰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기인한 것이니 실재하는 것이라고 보기조차 어렵지 않은가.

여성혐오는 엄연히 존재하며 여성을 실존적으로 위협한다. 더욱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어 그것을 거두어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능하더라도 수세기가 걸릴 것이다. 혐오사회 속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혐오의 공모자이다.독립적인 여성이 ‘나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라고 말할 때, 직장의 개념없는 여직원을 뒷담화하며 ‘여자 욕먹이는 여자들이 있어’라며 고개를 끄덕일 때, 남성들이 ‘내가 남자니까’라며 무리해서 일을 떠맡을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여성의 속성을 깎아내리는 데에 동의하는 것이다. 자기는 절대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일 수록 여성혐오자가 아닌지 의심해야한다.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혐오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If my feminism makes you feel icky

페미니즘 때문에 불편하게 느낀 후, “헉 어떻게하면 바꿀 수 있는거지?!” 라고 자문하는 대신 “나는 아냐 나는 아니라니까” 라며 짜증을 내게 된다면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photo from flikr)

문제는 혐오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정치적 혐오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근절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문제삼아야할 것은 혐오가 용인되는 풍토이다. 명백히 여성혐오 발언을 한 개그맨들이 사과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이 용인되고, 성범죄를 미화한 사진을 잡지 표지로 싣고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고집부리고, 여성 아이돌의 본분은 극한상황에서도 인형처럼 예쁜 것이라는 말같지도 않은 주제의 쇼프로그램이 버젓이 전파를 타는 것에 우리는 부끄러워해야한다. 분노해야한다. 혐오 문제를 계속 토론의 장에 끌어다 놓아야 한다. 혐오의 명명백백한 존재와 그 추한 모습을 끊임없이 까발려야 한다. 그것이 사회문제로서의 혐오가 일상 의미로서의 혐오에서 독립하여 저항을 위한 개념으로 자리잡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