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혐오와 혐오를 구별해야 하는가

말장난 같지만 그렇다. 사회문제로서의 ‘혐오’는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혐오’와는 다르다. 그러나 혐오가 사회문제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은 두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섞어 쓰며 경계를 흐린다.  <왜 혐오와 차별을 구별해야하는가> 를 읽으며 필자 임예인이 전자의 의미를 잘 모르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라면 어째서 ‘산낙지를 혐오하는 것’과 ‘여성을 혐오하는 것’을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혐오문제를 호불호의 영역으로 교묘히 편입시키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누군가 산낙지를 혐오하는 것은 그냥 산낙지를 싫어하는 것이지만 여성을 혐오하는 것에는 그 이상의 정치적 의미가 들어간다.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어휘가 일상에서 사용되는 어휘와 의미가 어긋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도 일상에서 의미하는 왼쪽 오른쪽 방향과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혐오라는 단어가 정치적 맥락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면 시간을 조금 내서 아래 인용문을 봐주기 바란다. 사실 임예인이 반박하고 있는 <‘개독’은 혐오표현일까?> 에 사회문제로서의 혐오는 제법 명쾌하게 정의되어 있다.

여기서 논의된 ‘혐오’는 인간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혐오의 감정 그 자체가 아니다. 개인의 감정을 법적, 제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감정을 빌미로 특정 집단을 낙인찍은 뒤 폭력을 휘두르고, 제도적 차별을 조장하며, 그렇게 타인을 실존적으로 위협할 때, 우리는 그것을 ‘혐오표현’이라고 이름하고 규제할 수 있다. (손희정, <‘개독’은 혐오표현일까?>, 경향신문 2016-02-16)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점잖게 “저는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의 도덕적 신념을 표현한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고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법에 서명하며 하는 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의 발언과 행위는 곧 비난에 직면할 것이다. 백인 청년이 “흑인들은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더러워서 싫다”라고 하면 단순히 호불호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게 된다. 백인이 흑인을 착취하고 차별해온 역사적 맥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백인 청년은 스스로 역사적 맥락에 무지했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을 한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혐오는 내면화된 차별이다.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혐오가 차별이 아니라는 주장은 맥락에 무지할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맥락 속에 살고 있는가. 수천년 지속되어 온 가부장제라는 맥락이 있다. 가부장제는 여성이 욕망하는 대상과 욕망 그 자체를 하찮은 것, 무가치한 감정으로 취급한다. 여성을 가정의 수호자라는 지정석에 가두고’정상적’인 가정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사회적으로 매장해왔다. 가사노동이나 육아 등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떠넘겨진 노동에는 경제적 가치조차 매기지 않는다. 가정 밖 사회도 대부분 남성의 보조자 역할로서의 자리만을 허용한다. 여성스러운 태도는 비전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뛰어난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여성이라도 외모로 품평을 한다. 여성이 하는 소비는 남자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하는 것이라고들 지레짐작한다. 여성을 복장과 태도 다방면에서도 철저히 통제한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본능에 이끌린’ 가해자 보다는 ‘칠칠치 못한’ 피해자를 비난한다. 아무리 성폭력 가해자 80%는 면식범이고 대다수가 계획범죄라는 객관적인 증거를 가져다 주어봤자 피해자가 짧은 치마를 입고 밤거리를 거닌 게 아니냐는 둥 애꿎은 품행을 탓하기 일쑤이다. 우리가 여성혐오라고 할 때에는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성을 평가절하하고 억압하는 사회 풍조, 이것을 차별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는가.

물론, 임예인이라는 사람이 여성혐오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성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는 해당 글에서도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를 동등하게 둘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혔고, 성차별 문제도 성의있게 다루었다. 그럼에도 그의 글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고의였든 아니든 ‘혐오’ 개념에 물타기를 함으로써 여성이 정치적으로 고안해낸 언어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혐오가 수입된 용어이든 일상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든 그 단어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여성들이 독선적 태도를 취하든 상관없이 혐오는 -그가 말한대로- 혐오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어떤 단어가 힘을 잃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단어를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사용해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차별적인 의미로 쓰이던 단어를 오히려 차별받던 대상이 더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무력화 시킨 사례들도 있다. 성소수자가 스스로를 ‘퀴어(queer)’라고 칭하고 축제를 열거나, 성폭력은 여성의 옷차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괴이한 옷차림을 하고 ‘슬럿(slut)’ 행진을 하는 것 등은 단어가 가진 부정적 맥락을 파괴하고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부여한다.

SlutWalk NYC October 2011 Shankbone 28

슬럿워크 현장 (photo from flickr)

저항적 의미로 고안된 단어가 탈맥락화하면 무력해지기는 마찬가지이다. ‘혐오’라는 단어를 통해 관습적으로 지속되어 오던 여성에 대한 무의식적 차별이 비로소 개념적으로 규정되고 여성운동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이 단어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쓰이면서 그 힘은 급격히 약해지고 있다. 외국인, 장애인 등 다른 사회적 약자 혐오에까지 논의가 확대되기도 전에 말이다. 방송에까지 ‘남성혐오’가 마치 여성혐오와 마찬가지의 사회문제인 양 등장한 것을 보며 혐오 프레임의 유통기한은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임예인의 글을 읽으며 아무래도 당분간 이 단어, ‘혐오’를 지키려는 노력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혐오라 부를만한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 그리고 제도적으로 혐오를 규제하기 어렵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여성’혐오’와 남성’혐오’ 사이의 엄연한 간극을 모호하게 지나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전자는 차별적 풍조이고, 후자는 산낙지 혐오와 비슷한 감정상의 문제이다. 메갈리아라는 커뮤니티에 한국 남성을 싸잡아 비하하고 욕지거리를 해대며 싫다싫다 혐오한다 떠드는 글이 실리기는 한다. 그런 의미의 남성혐오가 존재한다고는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호들갑 떨 문제인가. 산낙지를 싫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산낙지의 싫은 점을 떠드는 게 사회문제이냐는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남성을 혐오해도 실제 사회에서 남성의 실존을 위협하는 차별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사실, 메갈리아에 등장한다는 남성혐오는 여성혐오를 거울에 비춰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기인한 것이니 실재하는 것이라고 보기조차 어렵지 않은가.

여성혐오는 엄연히 존재하며 여성을 실존적으로 위협한다. 더욱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어 그것을 거두어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능하더라도 수세기가 걸릴 것이다. 혐오사회 속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혐오의 공모자이다.독립적인 여성이 ‘나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라고 말할 때, 직장의 개념없는 여직원을 뒷담화하며 ‘여자 욕먹이는 여자들이 있어’라며 고개를 끄덕일 때, 남성들이 ‘내가 남자니까’라며 무리해서 일을 떠맡을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여성의 속성을 깎아내리는 데에 동의하는 것이다. 자기는 절대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일 수록 여성혐오자가 아닌지 의심해야한다.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혐오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If my feminism makes you feel icky

페미니즘 때문에 불편하게 느낀 후, “헉 어떻게하면 바꿀 수 있는거지?!” 라고 자문하는 대신 “나는 아냐 나는 아니라니까” 라며 짜증을 내게 된다면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photo from flikr)

문제는 혐오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정치적 혐오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근절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문제삼아야할 것은 혐오가 용인되는 풍토이다. 명백히 여성혐오 발언을 한 개그맨들이 사과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이 용인되고, 성범죄를 미화한 사진을 잡지 표지로 싣고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고집부리고, 여성 아이돌의 본분은 극한상황에서도 인형처럼 예쁜 것이라는 말같지도 않은 주제의 쇼프로그램이 버젓이 전파를 타는 것에 우리는 부끄러워해야한다. 분노해야한다. 혐오 문제를 계속 토론의 장에 끌어다 놓아야 한다. 혐오의 명명백백한 존재와 그 추한 모습을 끊임없이 까발려야 한다. 그것이 사회문제로서의 혐오가 일상 의미로서의 혐오에서 독립하여 저항을 위한 개념으로 자리잡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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