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 백만개 촛불 속에서

광화문 앞에 백만개 촛불이 켜졌다. 압도적인 수의 군중이 촛불로 서로를 밝히는 밤의 광경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그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도 걱정거리를 찾았다. 이 걱정거리들도 다 잘 해결돼서 한 10년 쯤 후엔 다 기우였다며 웃기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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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는 기사에 누군가 “어린 학생들까지 이런 데 나가게 해서 미안하다”는 댓글을 남겼다. 선배 시민으로서 이런 세상을 만들어버린 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심정에는 공감하지만 그 이유가 석연찮다. 청소년이 집회에 참석하는 것에 ‘미안해’하는 것은 미성년자가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에게도 사회에 정치적 요구을 할 권리가 있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다. 그들은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할 뿐이다. 어째서 그들이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에 ‘미안하다’고 말하는가. 청소년도 동료 시민이다. 함부로 미안해하지도 말고, 감히 대견해하지도 말 일이다. 멀찍이서 구경하며 대상화할 게 아니라 곁에 서서 목소리를 듣고 생각을 나누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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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당선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박근혜와 싸우는 동시에 여성혐오와 싸워야 하겠구나.” 아니나다를까 이번에도 박근혜와 최순실의 여성이라는 특성 자체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꼴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유력 정치인 입에서도 ‘아낙네’라느니 ‘아주머니’라느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판국이다. 여성을 비롯해 장애인, 청소년 등 소수자를 억압하며 외치는 정의는 반쪽자리 모순덩어리 정의일 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를 지적하고 자정해나가는 움직임 역시 눈에 띈다는 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성혐오적 표현을 지적하면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사소한’ 데에 집착한다며 핀잔을 주던 분위기였음을 떠올리면 참 다행한 일이다. 세상은 반드시 변한다. 냉소와 싸우며 계속 나아가다 보면 벼락같이 변화는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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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위’에 대해 생각한다. 이번에도 시작도 하기 전부터 집회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물리적 충돌이 있으면 국면전환 계기가 되어버릴 수 있다며 행동거지에 유의할 것을 당부하는 말들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안타깝게도 최근 몇 년 간 언론의 ‘폭력시위’ 프레임에 갇혀 집회 참가자들은 강박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기검열을 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말하는 이의 ‘태도’를 핑계삼아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는 것은 권력자의 못된 버릇이다. 집회 참가자와 공권력 간의 충돌 유뮤보다 시민들이 시위로 전하려는 메시지가 얼마나 정당한가가 훨씬 중요하다.주최측이 보다 많은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무력충돌 없는 안전한 집회를 전략적으로 기획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며, 그 긍정적 효과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당연한 권리인 시위가 권력자가 정한 테두리에 갇혀버린 상황은 염려된다. 한오라기 흠결 없는 자에게만 발언권을 ‘허용’하는 관습은 결과적으로 권력자의 손을 들어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