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학은 과학이 될 수 있을까

creation

모교에 창조과학 수업이 개설된다는 말에 흠칫했다. 급히 강의계획서를 들여다보니 심지어 우리 전공 교수님이 강의를 개설하신다.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강의를 개설하신 교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학교의 공학 교육자로서, 기독교인 과학자로서 느끼는 갈등을 학생들과 이야기해보고 싶었다고 하시는데, 충분히 나눌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창조과학’인가. 미국에서 한 때 유행하며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빼는 데까지 나아갔다가 과학 교육을 후퇴시킨다는 역풍을 맞고 결국 퇴출된 그 대표적인 의사과학(pseudo-science)이 “창조론과 진화론에 관한 과학적 접근을 통해 과학자로서 납득할 만한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까.

성경에서 흥미진진한 공룡 이야기를 기대했던 노엘 갤러거의 분노

성경에서 흥미진진한 공룡 이야기를 기대했던 노엘 갤러거의 분노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워낙 논쟁이 뜨거운 영역이라 직접 연구해온 전문가가 아닌 분이 섣불리 수업을 개설할 수 있을만큼 만만히 다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프레시맨 세미나라는 수업 자체가 그저 가벼운 교양 수업이기는 하다만, 수업은 수업이다. 게다가 대학 신입생에게 교수의 말 한마디는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 적어도 해당 분야에 관한 토론을 중립적 자세로 노련하게 이끌 수 있는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창조과학을 수업에서 다루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공학을 가르치는 분이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이다. 공학자라는 그 분의 권위에 의해 과학이 아닌 것이 과학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이 문제가 없듯 창조과학을 가르치는 것에 문제가 없다는 학교측의 입장은 무지한 것이거나 무책임한 것이다.

나 역시 비전문가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를 드러내보자면, 종교와 과학을 같은 잣대로 비교한다는 것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종교는 ‘믿는’ 것이고 과학은 ‘설명’하는 것이다. 기독교에는 어떤 절대적 존재와 그 존재로부터 기인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성경은 그 진리를 비추는 거울이거나 혹은 그 진리를 향하는 길일 것이다. 즉,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에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사실관계가 약간 어긋나거나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조금쯤 등장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달이 보이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다르다. 세상에 고정불변의 진리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과학자에게 별로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결론에 도달했는지,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해나가는 논리적 과정에 의미가 있다. 과학적 진리는 언제나 실험이나 관찰 결과에 기반한 조건부 진리이다. 한동안 정설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도 반례가 발견되거나 논리에 헛점이 드러나면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 과학은, 바로 그러한 혁명적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발전해왔다. 그러니 절대자의 존재를 처음부터 가정한 채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나, 객관과 논리를 잣대로 종교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모두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바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잘 모르지만 과학적 가치가 거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한다. 무엇보다 어떤 기작에 의해 종(species)이 발생하는지에 관한 설명이 없다. 아니, 설명이 필요한 곳마다 신이 등장한다. 종교적으로는 흥미로운 설명일지 몰라도, 과학적으로는 검증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거니와 아무런 유용성이 없는 가설이다. 연구 결과로 뒷받침되지 못한 채 결정적인 부분들을 신앙에 의존하는 한 창조과학은 의사과학(pseudo-science)일 뿐이다. 반면 진화론은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다양한 화석과 종분화 현상을 통해 진화현상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관찰되었으며, 다윈의 자연선택설로써 진화가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는지 설명되었다. 다윈의 이론은 150년 이상이나 살아남았는데, 한 패러다임을 뛰어넘을만한 이론이 150년 넘게 등장하지 못하는 일은 과학계에서 흔치 않다. 그만큼 다윈 이론이 진화현상을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고, 굳건한 권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진화론에도 오류가 있지만 과학으로 가르치는 데 문제가 없으니 창조론도 과학 시간에 가르칠 수 있다는 주장은 조선왕조실록에 오타가 있어도 사료로 쓰는 데 문제가 없듯 퓨전사극을 믿을만한 사료로 보는 것에도 문제가 없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종교는 과학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 마치 ‘과학적’이라는 말이 진리에 가깝다는 말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이지만 사실 과학이 그렇게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다. 촘스키의 비유를 빌리자면 과학은, 길 한편에서 열쇠를 잃어버려 놓고는 반대편 가로등 밑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찾고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열쇠가 그 곳에 없더라도 불 켜진 곳을 뒤지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 과학이다. 반면 종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 곳에 열쇠가 있다는 믿음만으로 어두운 곳을 더듬어 열쇠를 찾는 것이 아닐까. 성경에 비과학적 내용이 나온다고 해서 기독교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합리와 논리의 틀을 넘어설 수 있는 종교는 과학이 갈 수 없는 영역을 탐구하게 해준다. 굳이 과학이 되어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창조과학같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종교의 고유한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닌가? 만약 종교와 과학을 함께 놓고 이야기해보고자 한다면 종교 경전과 과학 지식을 억지로 꿰맞추는 데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종교와 과학이 서로 추구하는 가치와 방법이 다른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