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에 부치는 스물 다섯개 토막 생각

아직도 차마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범죄가 일어났다. 서울 한복판, 너무도 친숙한 공간에서.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온 것이 고통스럽게 죽어야할 단 하나의 이유였다. 여성들의 곡성이 터져나왔다. 며칠 안되는 시간 동안 여기에는 수많은 사건과 생각이 얽혀 거대한 여성문제의 집합소가 되었다. 누군가 강남역 살인사건의 어느 부분이 쟁점이냐고 묻는다 해도 도무지 하나를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아 하나의 글로 엮을 수도 없었다. 대신 짤막하게 하나씩 기록해 보았다. 적다보니 스물 다섯개나 되었는데도 쓴 말보다 쓰지 못한 말이 더 많다.

1. 남녀로 편가르는 것이 아니다 –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가부장제의 악습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남성 페미니스트와 여성 여성혐오자들을 많이 보아 왔다. 성별에 기반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단순하게 성대결로 치환하는 이들을 경계해야한다.

2. 이제는 여성혐오의 ‘혐오’를 감정상의 호불호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한 번 더 강조한다. 여성혐오는 사회문제이다. 여성에게 특정한 성역할을 강요하고 억압하고 착취한 가부장제가 수천년 지속되는 동안 사회 구성원의 무의식 속에 일종의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의식적으로는 성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무의식 속에는 여성적인 것은 열등하며 여성은 부수적인 존재이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이다 와 같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여성에게 고정된 성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성혐오(misogyny)일 가능성이 높다.

3.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들에게 페미니스트의 언어는 과격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한 쪽에 독점된 권력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기득권층이 자발적으로 대화에 응하지는 않다보니, 불러다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면 때로 윽박질러야할 때도 있다. 페미니즘의 과격한 언어 때문에 당황하신 분들께 송구스럽지만 우리에게는 친절하고 품위있는 말을 고를만큼의 여유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변명을 보태자면 서양에선 여성들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것은 물론 폭탄테러도 서슴치 않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상당히 점잖고 숙녀적인(?) 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남성들이 여성혐오자로 낙인찍힐까봐 자유롭게 의견표현을 못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김영란법 때문에 뇌물을 주고받지 못해 경기가 침체된다고 걱정하던 기사가 생각났다. 꼴페미로 낙인찍힐까봐 아무 말도 못하던 여성들에 대해서는 기사가 나온 적도 없는데.

5. 우리는 남성들이 아무 말도 못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문제에 관해 대화하고 싶다. 더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과의 토론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누가 누구를 이기기 위한 설전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살아도 남성과 여성은 -또한 둘 중 하나의 성으로 특정할 수 없는 성별의 사람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산다. 서는 곳이 다르면 보는 풍경도 다르다고 했다. 설령 그 풍경을 볼 수는 없다해도 다른 (틀린 게 아니라) 풍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는, 이제까지의 객관성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경험이 객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기존의 객관성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객관성을 부분화, 맥락화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이란 권력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며, 권력 관계에 따라 변한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6. 가까운 사람들 입에서도 여성혐오적인 말이 나올 때가 있다. 나는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게 지적할 방법을 고민하다 타이밍을 놓친다. 고민이 많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결코 악의적으로 여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말로 나를 걱정해서 조언한다고 해주는 말일 때가 많다. 칭찬한다고 해주는 말일 때도 있다. 그 선의가 나를 슬프게 한다.

7. 여성 역시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도 여성혐오를 나에게서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다. 무의식에 여성혐오가 없는 사람은 아마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여성혐오를 인지하고 중지하려는 노력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이다. 나는 본인이 여성혐오를 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일수록 여성혐오자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8.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며 억울해하는 남성들의 다른 한 쪽에는 스스로 잠재적 가해자라고 고해하는 남성들이 있다. 무의식에 깔린 여성혐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부지불식간에 가해자가 되었을지도 모름을 반성하는 태도를 존경한다. 그것이 ‘선량한’ 자신을 의심하고 부정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임을 알기 때문에 더 그렇다.

9. 그러나 나는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스스로 잠재적 가해자라 말하며 사과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여성 대상 범죄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면서 가해자를 변호하거나, 가해자가 ‘진짜남자’가 아니라면서 남성집단에서 분리해고 있는 이들을 돌아봐 주기 바란다.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해주면 좋겠다.

10. 한 정신장애인의 개인적 일탈로 치부하면 일반 남성들은 더이상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 직원의 개인적 일탈이라고 하면 국정원은 댓글사태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선장의 무책임 탓으로 돌리면 된다. 세월호 참사 앞에 정부는 떳떳하다.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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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가해 남성이 살인까지 결행하게 된 것에는 조현병 증상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근본 원인은 아니다. 그의 내면에 여성혐오가 없었다면 여성에 대한 불합리한 증오심을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범행동기가 여성혐오가 아니었다면 대여섯명의 남성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끈질기게 여성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조현병 환자들의 이상행동에는 사회적 맥락이 있음을 언급하며 가해자에게 정신병력이 있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사회에 팽배한 여성혐오를 직시해야한다고 했다.

12.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가 자/타해를 할 확률은 일반인보다도 낮으며 강력범죄 피의자의 대부분에게는 정신질환이 없다고 한다. 발병 초기 불안정한 상태에만 적절한 약물치료를 받으면 안정적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그런데 조현병 환자들을 격리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들고 나오는 것은 얼마나 근시안적인가. 이는 또한 열심히 투병하고 있는 조현병 환자들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 보통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지 않기 위해 조현병 환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일반화하는 것은 괜찮은가?

13. 사회는 여성에게 가르친다. 남성에게는 제어불능의 폭력성이 내재되어있는데, 이 폭력성은 여성이 행동을 잘못할 때 폭발할 수 있는 것이니 버튼을 누르지 않게 조심하라고. 이 가르침은 여성의 안전을 기원하는 선의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 가르침이야말로 모든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라는 말이지 않은가. 나는 이 가르침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폭력성은 성별에 무관한 것이고, 얼마든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제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남성의 폭력성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떨칠 수는 없다. 폭력성을 나에게 분출하고는 “저 여자가 버튼을 눌렀어”라고 핑계댈 자를 언제 마주치게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4. 선량한 남성이 99.9% 인 가운데 0.1%라도 나를 강간하거나 살해하려고 노리는 자가 섞여 있다면, 나는 100% 모든 낯선 남성을 잠재적 위험으로 간주하고 경계하는 편이 안전하다. 길에서 스친 남성이 나를 적대적 눈빛으로 보기만 해도, 대중교통에서 모르는 남성이 너무 가까이 서기만 해도, 혹은 인적 드문 밤길을 걸을 때 발소리만 들려와도 나도 모르게 머리털이 쭈뼛 서며 방어태세가 된다.

15. 여성 대상 강력 범죄가 이슈가 될 때면 잔소리를 듣는 것은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들 쪽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 조심에는 비용이 든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하던 일을 중단하고 일찍 귀가해야 하고 가야할 곳에 자유롭게 가지 못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참아야 하고 남성 동행 없이는 택시도 타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매일 걷는 거리를 걸을 때에도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루이틀이 아니라 매일 외출할 때마다 신변 걱정을 하는 것에는 큰 에너지가 소모된다. 특히, 해야할 일을 다 못하고 가야할 곳에 가지 못하는 것이 반복되면 내가 충분히 성취할 수 있었던 것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16. 그런데 나는 이렇게 개개인이 주변을 경계하는 전략의 효과도 의심스럽거니와, 설령 효과가 있더라도 사회 전체의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껏해야 나 말고 다른 여성에게 불운이 옮겨가도록 만드는 것이 조오심에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효과 아닌가.

17. 내가 조오심을 불신하는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이러저러하게 조심해야 폭행당하지 않는다는 말을 뒤집으면 그러지 않았을 때 당하는 폭행에는 내가 조심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사람들에겐 피해자가 입은 옷이나 평소 행실,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 같은 데서 원인을 찾는 버릇이 있다. 진실은, 내가 어떤 옷을 입든 어디에 가든 무슨 말을 하든 폭행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8. 여성이 매번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이유가 단지 완력 차이는 아니다. 가상의 동양인이 백인에게  살해당한 우화로부터 폭력이 단지 체급 문제는 아니라는 것, 폭력이 약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되새겨볼 수 있다. 여성을 단지 ‘신체적 약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에는 여성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너무나 작고 가늘다.

19. ‘강간문화 (rape culture)’라는 말이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용인되거나 정상으로 간주되는 환경“을 뜻하는 말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묵인함으로써 폭력을 확산하고 또한 그 폭력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여성을 종속되게 한다는 개념이다. 논란이 있는 개념이긴 하다. 그러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쉽게 용서되고 오히려 피해자가 원인제공을 했다고 생각하거나 피해자가 됨으로써 이득을 취하려는 게 아니냐 (꽃뱀)는 의심을 하는 사회현상을 수없이 목격한 것이 사실이다.

20. 사건 발생 직후 언론은 어땠나. 여러 범행동기 가설 중에서도 용의자의 비상식적인 진술을 택해 ‘여자가 무시해서’라는 제목의 기사를 도배했다. 여성들에게 “남자 무시하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그 진술에 대해 ‘그게 말이 되냐 다른 범행동기 숨기려고 뻥치는 거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면 제목으로까지 뽑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와중에 고인을 ‘화장실녀’라는 모욕적 명칭으로 대상화한 기사도 있었으니…

21. 여성혐오살인이 발생했음을 인식한 여성들이 사회의 여성혐오가 위험수준임을 지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상치 못한 거센 반향에 가해자의 정신병력이 갑자기 강조됐다. 진실인 양 도배됐던 가해자의 진술이 곧바로 망상적 헛소리로 전락했다. 충분한 정신감정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경찰측은 정신 이상자 소행이며 한국에는 혐오범죄가 없다고 서둘러 일축했다. 하나의 사례로 혐오범죄가 일어난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이것은 여성혐오범죄의 첫 사례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여성혐오라는 개념조차 없었으니 혐오범죄로 규정되지 못했을 뿐.

22.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던가. 어째서 연쇄살인범은 거의 항상 여성을 타겟으로 삼는가? 완력 차이는 설명의 일부는 될 수 있어도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들이 살인을 정당화하던 논리에는 언제나 여성혐오가 있었다.

23. 이 사건은 분명 사회적 약자를 향해 분출된 분노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특정집단에게 향해진 분노임을 간과하고 ‘사회적 약자’로 뭉뚱그려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불평등 문제의 해결은 불평등이 존재하는 부분을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여성혐오범죄를 여성혐오범죄라고 규정하지조차 못하는 단계에 있다. 여성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맗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아무런 실천도 누구의 책임도 수반하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여성혐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혐오다. 계층의 단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단절이다. 당신의 불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불행이다.” 말이 되는 것 같다. 의미 없는 말일수록 말이 되는 것 같다.
황현산

24. 지금 한국에 있는 여성들은 혼자서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조차 겁이 난다고들 한다. 그 공포에 충분히 공감한다, 나 역시도 느껴본 적이 있으므로. 그러나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도 무서움을 멈추어 하던 일들을 계속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나의 삶까지 포기할 수는 없기에. 또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생존의 방법이라고 믿기에.

25. 사람들의 관심은 곧 사그라들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생활 속으로 돌아가야하고 각자 생활의 무게를 지기도 바쁠 것이다. 그러니 지속적으로 내 몫의 목소리까지 내어줄 사람들에게 후원금을 보낸다. 약소하나마, 내 지지와 염원을 표현하는 의미에서라도.